‘세상’의 아름다움은 끝에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한국의 아름다움, 충청도의 아름다움, 충주의 아름다움이라고 한정 짓지 않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끝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끝은 다른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남과 다른 여행을 의미한다.
대중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취향이 고급이다. 일상에서는 보지 못하는 낯선 곳이다. 그러기에 일상성의 탈피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땅끝은 해남에만 있지 않다. 세상에 땅끝이 해남 뿐인 것은 아니다. 바다가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나 땅끝이 존재한다.
여행지 공간 어디나 끝이 있다. 그 끝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획득할 것이다.
끝을 추구하는 여행은 기존의 여행 방식과 다르게 여행하는 것이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
누구나 여행을 가지만 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만족은 요원하고, 누적된 피로 상태로 일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끝은 가치 있는 존재와 만나게 하는 공간이다.
끝은 우연히 발견하기도 하지만, 철저히 기획을 하면 무수한 끝을 발견할 수 있다.
끝은 사람이 없는 곳에 있다. 사람만 피해 가더라도 그대의 여행은 성공에 근접해 진다.
끝은 샛길을 타고 간 공간에 존재하고, 아름다운 길을 따라 가다가 존재한다.
끝은 직선의 도로위에는 없고, 굽은 길을 타고 들어간 곳에 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샛길의 유혹에 기꺼이 굴복하라.
강과 바다 그리고 호수의 언덕 끝자락에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통일신라의 중앙탑이 충주 남한강가에 있다.
이 곳은 남한강을 바로 옆구리에 끼고 있기에 여느 탑보다 주목을 받는다. 보폭이 같은 두 사람이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출발하여 도달한 지점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끝이 아니라 중앙이 아닌가?
그런데 영토의 중앙에 있다는 중앙탑마저도 강가 바로 옆에 있다. 즉 달리 표현하면 땅이 끝나는 강가에 있는 것이다.
탑은 명절이나 세시풍속 때에 일반인은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고, 선남선녀는 탑을 돌면서 놀기도 한다.
아마도 일부러 원래는 이 곳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 실제로 중앙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반하고 자주 찾게 하려면 풍경이 있는 곳에 두어야 했을 것이다.
중앙탑 마저 끝에 있다.
어떤 이는 중간에는 끝이 없냐고 묻는다.
나는 수도 서울의 곳곳을 여행했다. 서울 여행인 것이다.
수도 서울은 우리나라의 중심 도시다. 아니 그런 곳에 풍경이 있기나 하냐고 다들 의아해 한다.
아무리 도시라 해도 변방은 있다. 그곳이 아름다움이 있는 끝이다.
“그렇다면 4대문 안은 너무도 중심이니까 아름다움은 없겠네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아니다. 아무리 중심이라해도 중심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아름다움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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