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주봉의 영국 답사기
<에딘버러 홀리룻 팰리스와 제임스 1세>
사실 에딘버러에는 볼거리가 제법 많다.
특히 8월의 에딘버러 페스티벌 기간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문제는 축제기간에 그곳에서 숙박하려면 미리미리 한달 이상 앞두고 예약할 필요가 있다.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에딘버러 인근의 숙박지를 알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에딘버러의 전경을 보는 동시에 유서 깊은 관광 명소를 둘러보려면 에딘버러 캐슬이 가장 좋다.
에딘버러 캐슬은 사화산 꼭대기에 건축돼 있어 인근에서 보기 드물게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는 건축물이다.
사실 해발 13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인근의 지형이 낮아서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에딘버러 역에서 천천히 걸어가도 생각보다 멀지 않으며 가는 길에도 볼거리들이 있는 만큼 바쁘지 않다면 굳이 차를 탈 필요도 없다.
옛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구조처럼 도시 최후의 방어 요새 기능을 할 수 있는 위치이며 그만큼 험난한 곳에 단단하게 돌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웃한 건물들도 대개 돌이나 벽돌로 지어져 있어 고풍스러운 풍경이 전개된다.
에딘버러 캐슬 자리는 12세기부터 왕궁이 자리 잡았던 곳인 만큼 중세 시기에는 특히 스코틀랜드의 독립 전쟁과 관련해 중요한 격전지가 됐었다.
17세기부터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가 통합됨에 따라 이후부터 왕궁의 지위는 더욱 약화되고 군사적 기능만 남게 됐다.
오늘날에는 전쟁기념관이 마련돼 있어 스코틀랜드의 마사다 같은 느낌을 준다.

에딘버러 페스티발 기간에는 에딘버러 캐슬 입구에 있는 광장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딘버러 군악연주회(Edinburgh Military Tattoo)가 있다.
이 행사는 8월에 진행되며 백파이프 군악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군악대는 물론 영국 각 군의 군악대 및 유럽 다른 나라들의 군악대 연주 행사들이 열린다.
다만 그 관람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에딘버러 페스티벌 기간에는 각종 길거리 공연들이 있어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에딘버러 역 앞에서부터 에딘버러 캐슬로 이어지는 길거리들에서 이런저런 공연들을 즐길 수 있다.
또 세인트 자일즈 성당 인근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자랑이랄 수 있는 아담 스미스(1723-1790)의 동상이 서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는 사실 경력관계로 보면 글래스고우와 더 관련이 깊다.
스코틀랜드의 왕궁하면 단연 에딘버러의 홀리룻 팰리스다.
많은 왕과 왕비들의 삶이 배어있는 곳이다.

전시물들은 당연히 스코틀랜드 왕실이나 귀족들과 관련된 초상화나 수집품 등이 단연 많이 차지하고 있다.
영국혁명의 정치사와 관련하여 대개 제일먼저 비중 있게 서술되는 왕 제임스 1세도 본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서 이곳 홀리룻 팰리스에서 출생하고 통치했다.
본래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6세로서 왕위에 올랐던 그는 1558년부터 영국을 통치하던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이 직계의 왕위 계승자가 없어 제임스를 후계자로 지명함에 따라, 그녀의 사망 후인 1603년에 3월 24일에 그녀의 왕위를 계승했다.
대규모로 구성된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을 막아내고(1588) 잉글랜드에 황금시대를 가져다줬다고 사람들이 칭송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안타깝게도 왕위를 넘겨 줄 자식이 없었다.
이에 결국 헨리 7세(1457. 1. 28~1509. 4. 21)이후 150년 전통을 자랑하던 튜더왕조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의 후계자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지명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결정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먼저 혈연관계를 보자면, 제임스는 1566년 6월 19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결혼한 헨리 8세(1509-1547 통치)의 누이였던 마가렛의 손녀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과 그녀의 사촌이자 잉글랜드 헨리 7세의 후손이었던 로드 단리(Lord Darnley)가 결혼해 낳은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제임스는 엘리자베스의 조금 먼 조카였다.
그러나 혈연관계가 있다고 해서 엘리자베스와 제임스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쉽게 편해질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는 불행한 과거가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어머니 메리가 가톨릭교도로서 종교개혁 중인 국민들과 대립하는데다가 그녀의 남편 로드 단리를 사고로 위장해 살해했을 것으로 혐의를 받고 있던 보스웰 백작(James Hepburn, 4th Earl of Bothwell)과 재혼을 추진하는 등의 행태 때문에 귀족들의 봉기로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고 그 아들이 제임스 6세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에서 19년간이나 엘리자베스를 의지했다.
메리는 혈통 상 튜더 왕조의 뿌리인 헨리 7세의 손녀로도 볼 수 있었던 관계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까지 주장할 수 있었던 바, 엘리자베스에 의탁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잉글랜드 내 가톨릭파 음모와 결탁된 증거를 확보한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처형했다.
그것이 1587년 2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1586년 베르윅 조약(Treaty of Berwick)으로 메리의 처형에 대한 제임스의 동의를 받아냈다.
그것은 제임스에게 자기 어머니의 처형에 동의하게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듬해에 스페인 무적함대가 잉글랜드를 공격하던 결정적인 위기의 때에 제임스는 엘리자베스를 전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엘리자베스의 신임을 크게 샀을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재임 중 후계자 문제를 일체 비밀로 지키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임종 직전에 제임스를 새 잉글랜드 왕으로 지목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인 새 국왕은 조지 부카난(George Buchanan)이라는 저명한 학자의 교육을 받고 자라서 박식했다.
그리고 제임스는 당시 유럽의 정세에 따라 왕권은 신이 내려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다.
그는 이미 1598년에 발행한 ‘자유로운 군주정의 진정한 법(True Law of Free Monarchies)’이란 글을 통해 이를 주장했는데, 그는 왕권도 교황권처럼 사도적 계승권 즉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유래된 초월적 권리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이란 비록 신중해야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보다 고상한 존재로서 국왕 대권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봉건적 주군이 그의 봉토를 소유하듯이 왕은 자기 영토의 소유자로서 모든 신분과 의회 그리고 법에 앞서는 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임스는 그의 큰아들 헨리를 위해 만든 ‘신(神)의 선물(Basilikon Doron)’이란 책에서 새로운 법을 제정할 때 말고는 의회를 열지 말아야 한다고 종종 주장했다.
이것은 훗날 왕의 정책에 일일이 간섭하려했던 잉글랜드 의회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임스는 잉글랜드 왕이 된 후 처음 소집한 의회(1609)에서도 “국왕을 신(神)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국왕은 지상에서 신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라고 선포했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제임스와 찰스 부자의 그런 점들이 결국 혁명을 초래했다고 본다.
조한웅 기자 hwcho@fe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