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대비 108조7000억원 증가
상반기 역대 최대 증가폭 기록
풀린 돈 소비·투자로 이어지지 않아 정책당국 '고심'

[FE금융경제신문= 정성화 기자] 올해 상반기 국내 은행권 예금(수신 잔액)이 100조원 넘게 증가했다. 코로나19 글로벌 확산으로 인한 경제충격을 막고자 정부와 한국은행이 역대급 재정·통화정책을 썼지만 이중 상당 부분이 가계와 기업의 소비·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은행에 쌓이고 있는 것으로 보여 재정·통화정책 당국의 고민이 깊어졌다.
27일 한은에 따르면 올해 6월말 기준 은행 수신 잔액은 1858조원으로 지난해말 대비 108조7000억원 증가했다. 상반기 은행 수신 잔액 증가액은 역대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최근 3년간을 살펴보면 은행 수신 잔액은 지난 2018년 상반기에는 전년말 대비 52조원이 늘었고, 2019년 상반기에는 50조원이 늘어, 올해 상반기 증가액의 채 절반이 되지 않은 수준이었다.
올해 상반기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고자 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고 한은은 기준금리를 연 0.5% 수준까지 내렸지만 이렇게 풀린 유동성의 상당수가 은행에 쌓여있다는 의미다.
월별로 살펴보면 2월에 35조9000억원, 3월에 33조1000억원, 5월에 33조4000억원이 증가했다.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증가가 안정적으로 관리된 6월에는 18조6000억원 늘어나 증가폭이 다소 줄었다.
은행 수신 잔액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데 덩달아 대출 잔액도 늘고 있다.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은행의 기업·자영업자 대출은 총 77조7000억원이 늘었고 같은 기간 가계대출도 40조6000억원이 증가했다.
즉, 올해 상반기 중 가계·기업 대출이 118조3000억원 늘어나는 사이 은행 수신이 108조7000억원 증가했다. 이는 가계와 기업이 경제 불확실성을 의식해 대출을 급속히 늘렸지만 소비나 투자에 나서기보다 예금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경기 불확실성을 대비해 상당수 가계와 기업이 여유자금 확보 차원에서 일단 대출을 받았지만 정작 투자나 소비할 곳을 찾지 못하면서 확보한 자금이 그냥 은행 예금으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증가한 예금의 성격도 이를 뒷바침한다. 늘어난 은행 수신 108조7000억원 중 107조6000억원이 수시입출식 예금으로 즉시 찾아 쓸 수 있는 성격의 예금이다. 언제든지 마땅한 투자처가 생기면 은행을 이탈해 주식이나 부동산 시장에 몰릴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은행들이 신용도가 좋은 가계·기업에만 대출 문턱을 낮춘 것도 수신액이 급증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한다. 신용도가 좋은 가계·기업의 경우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후 긴급하게 생활자금이나 운영자금으로 쓰기보다는 여유자금으로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렇게 풀린 돈이 소비나 투자에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재정·통화 당국의 고민도 깊어졌다. 코로나19가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계 저축이 급증하면서 정부·중앙은행이 앞으로 통화·재정정책을 어떻게 구사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가계와 기업의 저축이 이미 많아 유동성이 풍부한 상황에서 계속 경기 부양책을 쓰면 경제가 가열될 가능성이 있고 아직 실물경제가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양책을 중단하면 급격한 경기침체가 올 수 있다.
기획재정부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저축 증가가 단기가 아닌 중장기적인 성격의 자금 비축이라면 더 강도 높은 소비 활성화 대책의 필요해 보인다"면서 "다만 현재 시점에서는 늘어난 저축의 성격을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고 추가 정책의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성화 기자 jsh1220@fetimes.co.kr